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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두 손 모아

두 손 모아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살다 보니 기도할 상대가 점점 늘어간다. 안위를 빌다가 기억 못 하고 놓친 사람이 있나 걱정하다 엉망이 된다. 물론 내 마음을 다 헤아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신이 아니다. 부족한 믿음과 나약한 성격을 지닌 나이다. 머릿속에 일일이 기도 할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힘주어 곧게 세운 손끝이 흩어지며 깍지 손이 된다.     며칠 전에 외숙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아는 주위 사람을 돌아보아도 숙모처럼 건강한 삶을 살던 분을 뵌 적이 없다. 병명도 생소하다. 독감 주사 맞고 일어난 과도한 면역력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했다. 너무 건강해서 생긴 일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촌들이 어머니 환송 예배를 드린다 해서 남동생, 제수씨, 여동생과 같이 가게 되었다.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작고 아담한 교회가 보였다. 안에는 지인들과 교인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 숙모님에 대한 추억을 메모지에 적어 바구니에 담았다. 예배는 아들들과 손자 손녀들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지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며 인사를 했다. 웃음과 눈물 흐느낌이 범벅된 가슴 따스한 시간이 되었다.   지인들이 기억하는 그녀는 강인했다. 뉴욕 봉제공장에서 막노동하면서도 한 마디 불평 없이 치열하게 사신 분이었다. 아들, 남편, 손자 손녀들에겐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을 제공한 요리사였다. 우리는 둘째 아들의 집으로 몰려갔다. 조카들이 와있었다. 이름을 묻고 하나하나 안아주면서 얼굴을 가슴에 새겼다. 어릴 적 보고는 십 년도 더 훌쩍 넘어가 커버린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음식을 먹으면서 사촌들끼리 재잘거리며 정 나누는 소리가 예쁘다. 슬픔을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서 행복했다.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힘든 삼촌을 꼭 안아드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손자 손녀들이 몰려와 할아버지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삼촌은 옅은 웃음을 머금으셨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나와 여동생에게 말씀하셨다. “악처라도 며느리보담은 나아. 눈치가 보여.”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리움으로 가득한 음성이 흔들렸다.     일 년 차이로 뒤따라온 이종사촌들과 만남은 외로운 이민생활에서 신선한 위로였다. 정신없이 뛰어놀고 다투다가 울고 웃기를 반복한 일 년 남짓. 그 세월을 가장 행복했던 인생의 한순간으로 기억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좁디좁은 공간에서 뒹굴던 그때가 그렇게도 즐거웠을까?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동생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옛 노래를 들었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눈물이 자꾸 났다.     손을 모은다. 아직 어린 조카들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운동하라고 잔소리하시던 숙모의 모습을 그려본다. 힘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삼촌. 울먹이던 사촌들을 생각하며 부디 그들의 마음이 편해지길 기원한다. 슬프면서도 가슴 벅찬 행복한 만남이었다.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사랑하였기에 아픈 것이다. 이제 사순절이 온다.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목숨을 던지기까지 한 예수 고난 시기이다. 오늘 두 손을 모은다. 굳이 그러는 이유를 따지자면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 참으로 못 할 짓이기 때문이다. 고성순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손자 손녀들 아들 남편 어머니 환송

2022-03-08

[수필] 후회

“아파 누운 아버지는 놔두고 맨 날 돌아다닌다.”     아들의 핀잔에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분노가 가래처럼 끓었다.   작년 말 남편과 나는 노후대책으로 구입한 G 타운의 조그만 쇼핑센터를 개축 중이었다. 복잡한 개축공사와 함께 내 수필집 출판까지 겹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개축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갔다. 나는 그것이 과로로 나타난 노화현상인 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남편이 안방에서 쓰러졌다. 바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그는 악성 백혈병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얼마 전부터 기력을 잃어가는 남편을 보며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줄은 몰랐다. 온 몸이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답답했다. 슬픈지 어쩐지 감각이 없었다. 왜 그는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었을까. 3년 전인가 피검사를 받으러 가는 남편을 몇 번 따라 갔었다. 담당의사가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의사가 남편의 병을 알려주려고 그랬던 것 같았다.     의사는 그때 남편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내게 말했을 것이다. ‘루케미아(Leukimia)’ 영한사전에도 백혈병이라고 나와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 루케미아를 폐렴으로 오해했었다. 폐렴인들 남편의 나이에 가벼운 병은 아니었지만 병치레를 해본 적 없는 남편이라 죽을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때 내가 그의 병을 정확히 인지했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적어도 남편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 두 아들과 시댁 식구들이 알게 됐을 것이다. 겨울 낙엽처럼 내려앉는 남편을 보며 나는 후회와 죄의식과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아픈 아버지는 집에 두고 맨 날 돌아다닌다, 작은 아들이 홧김에 한 말이다. 그랬다. 남편이 워낙 건강했기에 나는 내 문학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의사는 사전에 그의 병을 알았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나의 후회와 죄의식과 슬픔을 매어달고 싶은 것이다.     낮에는 두 아들이 남편 곁에서 밀착 간호를 했지만 밤에는 내가 그의 곁을 지켰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누워있는 남편을 보며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그를 싸안았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이 앓아눕자 나는 지금껏 배워오던 기타 레슨과 문학공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개축공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것으로 남편이 가기 전에 개운한 마음으로 그를 보내고 싶었다.     의사는 일주일이 남편의 지상에서의 삶이라고 했다. 두 아들과 나는 상의 끝에 투석을 결정했다. 세 번의 투석 끝에 남편은 5개월의 생명을 연장 받았다. 평소에 건성건성 하나님을 믿던 나는 어쩔 수없이 하나님을 잡고 매달렸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착하기만 한 남편에게 그런 벌을 내리는 것일까. 벌을 주고 싶다면 오히려 방만하게 살아온 내게 줘야 하는 것을.   아침부터 아들에게 큰 소리를 낸 것은 내 잘못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어른답게 행동해야 하는 것을. 작심한 듯 내뱉는 작은 아들의 말이 또 가슴을 훑는다. 너만 슬픈 것 아니야. 내 가슴도 아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갈 무렵 쇼핑센터 사인판 견적을 받았다. 설계사가 설계했다는 쇼핑센터의 샘플을 둘러본 뒤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작은 아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내일 아침은 바쁘니 좀 일찍 일어나라고.     그런데 다음 날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게으른 것 같으니. 어제 밤에 말했잖아? 오늘 아침에 쇼핑센터를 돌아보고 간판설계사 만나기로 했다고. 네가 게으름 피우는 바람에 다 늦었어.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작은 아들네가 2층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2층 난간을 올려다보며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대자 한참 후 아들이 땡감 씹은 얼굴로 며느리와 손녀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 머리 속은 이미 부글부글 끓는 냄비처럼 부글부글 타고 있었다. 나와 아들의 말다툼은 차 속에서도 이어졌다. 남편이 애원하다시피 말렸지만 나는 아들과 계속 시시비비를 가렸다.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조용하고 너그러운 남편을 닮은 큰 아들. 내 붕어빵인 작은 아들, 남편과 작은 아들은 스포츠 친구다. 풋볼, 야구, 농구 등 경기가 있는 날은 두 부자의 명절이다. 특히 남편의 모교인 네브래스카 대학 콘허스커스팀 경기는 두 부자를 겨울 난로처럼 달군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또 남편을 유난히 따른다.   작은 아들이 은연중 퍼부은 말, 아픈 아버지는 놔두고 맨 날 돌아다닌다. 그랬다. 남편이 건강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은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아들이 빨간불에 정지를 했다. 순간 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려버렸다.     아들이 유턴을 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행여 아들 눈에 띌까봐 나는 심술궂은 마귀할멈처럼 얼른 옆의 빌딩 뒤로 몸을 숨겼다. 바로 그때 남편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뛰쳐나와 남편을 부축했다. 남편의 푹 꺼진 눈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내 가슴도 써늘하게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아들이 스르르 내 옆에 차를 세우며 엄마, ‘미안해’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들의 눈이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같이 훌쩍거렸다.     2017년 8월 15일, 남편이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그가 쓰러져 누운 5개월,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깊고 깊은 늪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허우적거렸다. 괴로웠던 시간들을 되새기며 이별이 어떻게 우리를 갈라놓는지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쇼핑센터 사인판이 의젓한 모습을 드러냈다. 상가 앞에 우뚝 선 간판.  그 옆에 남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임지나 / 수필가수필 후회 아들 남편 폐렴인들 남편 그때 남편

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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